2026년 02월 04일 수요일
[실리콘밸리 한 달 노트 #9] South Park Commons, 새로운 시도


<South Park Commons 건물 입구 간판>
중세 영국에는 가난한 주민들이 쓰던 공유지인 commons라는 개념이 있었다. 자기 땅이 아님에도 가축을 방목하거나 열매를 채집하고, 연못의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주민들이 함께 관리하면서 수익도 취하는 공유 공간이었다.
디지털 시대가 도래한 뒤에도 commons라는 개념은 선한 영향력을 실천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무료 이미지를 검색하다 보면 보이는 CCL 마크, 그중 두 번째 C가 commons다. 학교 과제나 비상업적 이용에서 우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철학의 도움을 받는다.
샌프란시스코의 액셀러레이터 South Park Commons(SPC)의 ‘Commons’도 이 맥락에 닿아 있다. SPC의 시작은 설립자 ‘루치 상비’의 집 식탁에 모였던 열 명이었다. 주로 페이스북 등 IT 기업의 엔지니어였던 이들은 인생을 걸 만한 과제(life’s work)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더구나 각자의 분야에서 성공을 이루다 보니, 후배 창업자를 재무적으로 돕는 액셀러레이터로의 진화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그들은 재능 있는 이들이 만나 아이디어를 나누고 높은 신뢰를 바탕으로 피드백을 주고받는 문화를 SPC 내에 만들었다.

SPC가 이름을 빌려온 South Park은 단순한 위치 정보가 아니라, 미국 IT 산업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유명한 지명이다. South Park는 150년 전 영국식 정원으로 시작됐다. 샌프란시스코에 처음 조성된 1호 공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곳이 그 무렵 엘리트와 사업가들이 살던 부촌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06년 대지진 이후 불타 버린 건물을 뒤로하고 부자들은 새로운 동네를 찾아 떠나갔다. 이후 블루칼라를 위한 숙소와 창고가 들어서며 쇠락일로를 걷다가, 디지털 시대에 창고들이 IT 스타트업의 터전이 되면서 다시 살아난다.
트위터도 여기서 시작했다. 웅장한 Market Square 건물이 아니라, 시작은 사우스파크 164번지의 작은 사무실이었다. 트위터가 나간 뒤 그 공간에 들어온 팀이 인스타그램이었다. 직원 13명, 매출도 없던 회사가 창업 2년 만에 10억 달러를 받고 페이스북에 팔렸다. 페이스북이 상장하기 불과 한 달 전이라 현금이 부족해 페이스북 비상장 주식을 섞어 받았고, 결과적으로 더 비싼 거래가 되었다. 이 역사적 사건들의 진앙지가 South Park 공원 앞 작은 사무실이다. SPC와 옛 트위터·인스타그램 사무실은 걸어서 1분 거리다.
미디어 플랫폼 창업으로 ‘금을 캐려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뜻에서 South Park는 Multimedia Gulch라는 별명을 얻었다. 인스타그램의 공동 창업자 마이크 크리거(Mike Krieger)는 본인의 금을 다 캔 다음에도 떠나지 않고, SPC와 밀접하게 교류하는 인물로 남았다.

<SPC의 아디티야 아가왈과 마이크 크리거 - “From Instagram to Anthropic with Mike Krieger”>
SPC 창업자 루치 상비도 페이스북 출신이다. 본인이 만든 스타트업 Cove가 드롭박스에 인수돼 부사장을 지냈다. SPC 공동 창업자이자 남편인 아디티야 아가왈은 CMU 동문으로, Cove 창업과 드롭박스를 함께했다. 커뮤니티가 본질인 조직이라 초기부터 여러 사람이 참여했다. 초기에 펀드 조성과 포럼을 설계한 아비찰 가르그는 지금 Electric Capital의 매니징 파트너다. SPC 출신들이 창업한 회사로는 Anthropic, Pilot, Render 등이 있다.

<10년 전에 열 명이 모여 시작했다. SPC 웹사이트에서 전재>
액셀러레이터로서 SPC의 가장 큰 차별점은 ‘탐색(explore)’의 중요성이다. ‘탐색’은 아직 뚜렷한 아이디어가 없는 극초기 창업자들이 전문가와의 대화 속에서 아이디어를 정리해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번에 15명이 선발된 ‘The -1 to 0 stage’ 펠로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혼자 노트북 앞에 앉아 기획하지 말고 사람을 만나라고 권한단다. 놀랍게도 누구를 붙들고 무엇을 물어도 최대한 오픈해서 진솔하게 답해 준다고 한다.
펠로우로 선발되면 표준 SAFE 조건으로 40만 달러(7% 기준)를 먼저 투자받고, 다음 라운드에서 추가 60만 달러가 보장된다. 돈이 필요 없으면 펠로우에 지원하지 말고 멤버로 참여하면 된다. 탐색하다가 창업을 안 하기도 하고, 창업해도 SPC 투자를 안 받는 경우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탐색’ 목적의 대화가 만개하는 분위기라 많은 창업자들이 South Park 공원으로 나온다. 공원 중간쯤에 Caffe Centro라는 커피숍이 있다. 이번 기수 펠로우로 선발된 지인과 3.50달러짜리 구수한 드립커피를 마셨다. 커피숍 안에도 창업자들로 빈자리가 없었다.
창업자의 심정과 고민은 창업자 출신들이 가장 잘 안다. 성공한 창업자들이 후배들의 시행착오를 줄여 주는 방법으로 커뮤니티 모델을 도입했다. 품이 많이 들기는 하지만, 선배가 개인 지도해 준다면 성공 확률은 당연히 올라갈 것이다. SPC 펠로우는 8주짜리 프로그램이지만 그걸 마쳤다고 바로 창업하는 건 아니고 시점은 각자 페이스대로 진행할 수 있다.
신흥 명문 SPC 펠로우와 전통의 강자 Y Combinator는 어떻게 비교될까? 같은 7% 지분으로 얻을 수 있는 투자금은 SPC가 약 2배 많다. 뚜렷한 사업 아이디어가 있다면 Y, 반면 ‘I don’t know yet’ 상태라면 SPC가 더 잘 맞을 것이다. 그리고 ‘최고·최다 동문 네트워크’를 원한다면 Y, 평생 속 깊게 교류할 동지를 원한다면 SPC.

<Caffe Centro의 모습, 평일 오전>
🗒️ 실리콘밸리 한 달 노트 시리즈 | by.기대
한 달 동안의 출장에서 만난 사람과 생각을 ‘관찰 노트’로 기록하고, 메모를 바탕으로 지금 한국에서 통하는 힌트와 질문을 꺼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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